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성강 전투 (문단 편집) == 대중매체에서 == 현재 [[대한민국]]의 사극물 중 유일하게 '[[후삼국시대]]'를 다룬 드라마 [[태조 왕건]]의 174회에서 179회까지 해당 전투가 나오는데,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한 차례 침공을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. [[고창 전투]] 이후 사기가 떨어진 [[후백제]]의 위기[* [[고창 전투]] 이후에 왕건이 서라벌을 방문하고 공직과 염흔이 고려로 귀부하기까지 했다. 다만, 실제로는 공직이 이 무렵 귀부한 것인데, 극 중에서는 배우의 건강문제로 일찍 하차 시키고 대신 염흔만 귀부하는 것으로 처리.]를 극복할 방법을 고심하던 [[견훤(태조 왕건)|견훤]]을 비롯한 후백제의 수뇌부 중 이찬 [[능환(태조 왕건)|능환]]의 부탁을 받은 파진찬 [[최승우(태조 왕건)|최승우]]의 건의로 예성강 전투가 계획되었다. 이 때 최승우의 전략은 고려의 예성강을 통해 개경을 침입해서 운이 좋으면 왕건을 죽이고, 막강했던 고려의 전함들을 박살내 고려 수군 전력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. 이 전략에 견훤은 흔쾌히 응했지만, 최승우가 그 총사를 [[신검(태조 왕건)|견신검]]에게 맡겨달라 건의하자, 지난 고창 전투 당시 신검이 견훤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적행위를 했었기에 견훤은 당연히 반대했다.[* 고창 전투 문서, 신검(태조 왕건) 문서 참고] 하지만, 최승우의 마지막 청이란 각오와 강력한 요청으로 결국 수락하고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며 황위를 물려준다는 약속을 신검에게 하면서 견훤은 그를 예성강 전투의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한 뒤 양검, 용건과 파진찬 최승우, 군사 종훈을 비롯해 신덕, 상귀, 파달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출전시키게 했다. [[후백제]]군은 최승우의 계획대로 당나라(후당) 무역선으로 위장한 후 고려 잠입에 성공해 정주와 염주 일대의 고려 수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, 뒤이어 고려의 황도인 개경을 공격, 황궁을 점령했다. 이때의 [[고려]]는 [[고창 전투]] 이후 왕건이 서라벌과 북방을 다녀오는 등 승승장구 했으나 유금필이 홍유와 배현경, 왕식렴의 견제를 받고 곡도로 귀양갔으며, 병부령 [[최응(태조 왕건)|최응]]이 병이 깊어 잠시 내봉경으로 물려나 공석이었다. 그리고 왕건은 정윤 무와 시중 김행선과 함께 다시 서경에 행차하는데, 이 때 정주와 염주를 지키던 수군들이 백제의 기습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만심에 빠졌다가 크게 당했다. 후백제군이 수군들을 사실상 궤멸시키고 황도로 다가오자, 황도에 남아있던 장수들은 적은 병력[* 당시 외곽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은 대부분 전멸당했고, 그나마 황도 외곽에 [[염상]]이 이끌던 군사들이 있었지만, 이들도 후백제군이 한번 쓸고 난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.]결사항전을 준비했으나, 병이 깊은 와중에서도 입궐한 최응의 계책으로 잠시 시간을 벌면서 퇴각하였다. 다행히 황궁에 있던 [[장화왕후|장화왕후(오도영)]]와 [[신명순성왕태후|충주부인(유수인)]]을 비롯한 황실 가족들은 내군장군 복지겸 덕분에 일부 궁인들을 제외하고는 무사히 살아남았다. 서경에서 왕건은 죽은 [[신숭겸(태조 왕건)|능산 아우]]와 견훤이 다가오는 악몽을 꾸다가 깼는데, 이후 그 급보를 받고 일행들과 사촌 왕식렴과 함께 황급히 돌아왔지만, 그 때는 이미 [[후백제]]군에 의해 황도 대부분이 다 타버린 뒤였다. 이 때 병이 깊었던 최응은 최지몽과 함께 일찍 퇴궐하다가 최승우의 서신을 받고 적진[* 신검이 이끌던 후백제군은 황도를 쓸고 난 뒤 바로 떠나지 않고 예성강 하구에 며칠 머물렸다.]으로 가 그와 마지막 독대를 하는데, 그 만남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[[후백제]]가 곧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었다. [youtube(Q1Hk6JfpUqw)] 이후, 백제군은 돌아오는 길에 유금필을 잡자는 애술의 의견을 받아들인 신검의 뜻으로 무리하게 곡도를 공격하다가 [[유금필(태조 왕건)|유금필]]의 계략에 걸려 몇 척 안 되는 어선을 개조한 군선과 북방 오랑캐들로 이루어진 병사들[* 이들이 이전 왕건의 북방 행차 당시 왕건뿐만 아니라 '대추장'이라 불리던 유금필에게도 '[[만세]](萬歲)'를 외치다가 유금필이 곡도로 귀양을 가는 계기를 만들었는데, 그럼에도 유금필이 곡도에 올 때와 [[후백제]]군을 무찌르고 나서 또 '만세'를 외쳤다. 유금필은 이 때도 경고를 하긴 했지만, 그래도 만세를 외치는 오랑캐들 때문에 울화통을 터트리는 모습을 보였다. 여담으로 이들의 대장 격인 인물을 향해 [[태조 왕건/유튜브 스트리밍|유튜브 스트리밍 댓글창]]에서는 '[[유금필]] 사생팬'이라는 별명을...]에 의해 빛나는 전과가 물거품이 된 채 병력의 태반을 잃고 그대로 백제로 돌아갔다. 이후 상황을 보면, [[고려]]는 개경에 돌아온 [[왕건(태조 왕건)|왕건]]이 곡도에 귀양 갔던 유금필을 대신들의 간청에 의해 풀어주면서 경계를 소홀히 한 몇몇 장수들을 곡도로 유배보냈고, 잠시 공석이 되었던 병부령에 배현경을 임명하면서 참석하지 않은 최응의 소식을 묻다가 중병에위독하다는 최지몽의 발언에 놀라 시중과 원로 장수들과 함께 집을 찾아가지만, 최응은 마지막 상소를 쓴 채 좌탈입망해 찾아온 왕건을 통곡하게 만들었으며, [[후백제]]에서는 [[견훤(태조 왕건)|견훤]]이 [[신검(태조 왕건)|신검]]의 군대가 이기고도 곡도에서 유금필의 기습으로 타격을 입은 사실에 실망했지만, 주변 노대신들과 [[금강(태조 왕건)|금강]]의 과보다 공이 컷다는 말에 마지못해 공을 인정하면서 [[운주성 전투|운주 전투]]를 준비하는데, 이 때부터 그의 [[종기|악성 등창]]이 발생해 이후 전투와 [[후백제]]의 정세를 어렵게 만든 결과가 서서히 찾아온다. [[분류:후삼국시대/전투]][[분류:상륙작전]][[분류:해전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